1. 통일신라
삼국을 통일한 후의 상황으로는 신라의 국력이 증대되었어 연대에 영토가 확대가 되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외 관계의 안정으로 생산력이 증가하여 증가하였고, 강력한 군사력 확보를 바탕으로 정치가 안정되었다. 무열왕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군을 축출하였다. 그래서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신문왕 때는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하였고,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9조 5소경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성하였고,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였다. 국학을 설립하고 9서당 10정을 조직하였다.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상대 등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육두품 세력을 강화시켰다. 성덕왕 때는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고, 경덕왕 때는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녹읍이 다시 부활하였다.
2. 통일신라 통치체제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는데 중앙 정치 제도를 정비하여 집사부와 시중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사정부를 설치하였다.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9주 5소경 제도로 정비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수도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군사와 행정상의 요지에 5소경을 설치하였다. 특수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향 부곡을 설치하였고, 상수리 제도로 각 주의 촌주 한 명을 수도 금성의 여러 관청에 보내어 일정 기간 근무하게 하여 지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였다.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국학을 설립하고 유교 정치 이념을 교육하였으며, 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하길 시도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3. 발해
발해가 설립이 되었는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면서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무왕은 독자적 연호인 인안을 사용하였고,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지역의 영토를 확보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문왕 때는 독자적 연호 대흥을 사용하였고,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중국 문화를 수용하고 신라와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였다.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고,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일본의 국서를 보내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하고 표방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선왕은 독자적 연호인 건흥을 사용하였고, 최대 영역을 확보하였으며, 주변 말갈 세력을 복속시켰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통치 체제를 완비시켜 전성기를 맞이하여 중국으로부터 해동 전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발해의 중앙 정치 체제는 3성 6부로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명칭과 운영에서는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중정대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부서였고, 문적원은 서적을 관리하고 주자감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지방 행정 조직으로는 선왕 때 5경 15부 62주를 완비하였고, 군사 조직으로는 중앙군으로 10위 지방군은 각지의 지방관이 지휘하였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4. 신라말 사회
신라 말에 사회가 혼란스러웠는데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150여 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고, 계속되는 반란으로 인하여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반란 중에 하나는 김헌창의 난으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고, 두 번째 반란은 장보고의 난으로 장보고가 정해진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왕위 다툼에 관여하였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지방민들의 봉기도 많았는데,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난 등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반발하였다. 이는 녹읍이 부활하고 귀족들의 사치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게 되고, 흉년과 전염병 등으로 농민의 생활이 피폐해진 게 배경이 되었다. 이는 신라 통치 체제가 동요되고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6두품의 불만이 날로 증진되었다. 이는 골품제의 한계로 관직 승진이 제한되자 불만이 증대하였고, 최치원이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으나 실패하였고, 실패하여 최치원을 중심으로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으나 진골 귀족들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육두품들은 신라 말 반신라적 태도를 보이며 호족들과 결탁하여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게 된다. 호족들이 성장하였는데, 사회적 혼란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호족이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아 사병을 보유하고 성주나 장군을 칭하면서 지방의 징세권, 행정권, 군사권 등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호족이 성장하였으며, 6두품 유학자 및 선종 세력과 손잡고 신라 정부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게 된다. 새로운 사상도 유행을 하였는데,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의 교파인 선종이 유행을 했고, 풍수지리절이라는 사상이 유행했는데, 이는 지리적 환경이 인간 생활의 기룡 화복에 영향을 끼친다는 인문지리학이 도선에 의해 널리 보급이 되었고 미륵 신앙이 유행을 하게 되었다.
5. 후삼국
후삼국이 설립이 되었는데 후백제는 견훤이 900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지정하여 성립을 하였고, 후당 오월과 외교 관계를 체결하며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신라의 적대적이어서 경주를 습격해 경애왕을 죽게 하고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수취하고 호족 세력 포섭에 실패하였다. 후 고구려는 901년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진 궁예가 세력을 키워 송악 개성의 도움을 세워 성립이 되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경상북도 상주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확장하였고 국호를 마진으로 변경 후 철원으로 천도하였다. 천도한 후에 다시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국정을 총괄하는 등 총괄하는 광평성 등 각종 정치 기구를 마련하였으나 지나친 미륵 신앙을 이용한 전제 정치로 신망을 잃어 신하들의 궁예를 축출하게 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남북국의 경제는 통일신라의 경제 정책으로는 수치 제도를 정비하였고, 민족 문서 즉 매년 총락의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손주가 3년마다 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는 조세의 공물 역 징수의 근거가 되었다. 토지 제도로는 신문왕이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서 왕권을 강화시켰고,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여 또 왕권을 강화시키고 농민 경제 안정을 추구하였다. 허나 경덕왕 때 녹읍이 다시 부활했었고 정전이 유명무실화되었다. 통일신라 때는 상업, 수공업, 국제 무역 그리고 신라인이 중국 진출을 하였고, 장보고가 9세기 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였으며, 서 남해 해상 무약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발해의 경제 활동으로는 수치 제도가 수치 체제가 있었고, 농업, 목축, 수렵이 발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