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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준비

고려시대

by leahya 2025. 2. 19.

1. 고려건국

 

왕건이 성장하여 고려를 성립하였는데, 왕건은 송악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고려를 건국하였고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시켰는데 936년 후백제가, 935년 신라가 항복을 하였고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였다.일리천전투, 황산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호족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하였는데 역분전을 지급하여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로와 인품에 따라 경기 지역에 한해 토지를 지급하였다. 결혼도 너무나 많이 했고, 사성 정책, 왕씨성을 하사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생 안정 정책으로는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을 설치하였고, 북진 정책으로는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을 중시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나타내었다. 왕권 안정책으로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담은 훈요 10조를 제시하였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추진하여 중국 후주의 쌍기를 영입하여 과거제를 추진하였고, 주요 정책으로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다과거제를 실시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제위보를 설치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켰다. 경종은 시정 전시과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여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채택하였다. 성종은 중앙 정치 기구를 정비하였는데 당의 제도를 수용한 2성 6부제를 기반으로 중앙 관제를 마련하였고, 지방 통치 제도로는 12목을 설치하였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유교 교육을 위하여 국자감을 설치하였고, 민생 안정을 위하여 의창을 설치하였다.

 

2. 중앙정치체제

 

중앙 정치 조직으로는 중서 문화성, 상서성이 있는데, 이 두 개의 성이 이성을 나타내는 바이고, 중앙 정치 조직은 2성6부제로 정비하였고, 중서 문화성 상서성이 이성, 그리고 6부가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을 담당하는 추밀과 왕명을 출납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고,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를 담당하였다대가는 서경 간쟁, 봉박의 권리를 가졌는데, 중서 문화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으로 구성이 되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 군사 문제를 관장하였는데, 고려 후기에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모든 정무를 관장하였다. 식목도감과 도평마사는 고려의 독자적 기구이다.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성종이 시비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현종이 전국을 오도와 양계 경기로 나눴다. 5도는 안찰사를 파견하여 도내를 순찰하였고, 양계는 병마사를 파견하였다. 향부곡소는 특수행정지역 구역으로 일반 군현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하였다. 중앙군은 26위이고, 지방군은 주진군, 주영군을 설치하였다. 과거제로 관리를 등용하였는데, 법제적으로는 양인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나 실제 양인은 주로 잡가를 응시하였고, 과거의 종류로는 문과, 잡과, 승과가 있었다그리고 음서제도로도 관리를 등용하였는데, 음서 제도는 고위 관료 자손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3. 문벌귀족 사회와 무신 정권

 

문벌 귀족 사회가 성립이 되었는데, 중앙 관료화된 지방 호족과 신라 6두품 출신들이 과거와 음서을 통해 관직을 세습하면서 문벌 귀족이 형성이 되었다. 왕실이나 귀족들 상호 간의 폐쇄적인 혼인을 바탕으로 가문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 대표적인 과문으로는 경주 김씨(김부식), 경원 이씨(이자겸), 해주 최씨(최충), 파평 윤씨(윤관)이 있었다. 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가 되었는데 이는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였고, 경원 이씨 가문이 계속된 왕실과의 혼인으로 80년간 정권이 유지되어 왕권이 약화되어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키고 일으켰으나 이자염과 척준경이 같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들의 불화로 이자겸이 제거되고 척춘경이 탄핵됨으로 실패하였다.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시행하였으나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로 서경 천도를 실패하였고, 묘청 세력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무신 정권이 성립이 되었는데보현원에서 정중부 이의방 주도 아래 무신정변이 발생되어 무신들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토지와 노비 소유를 확대함으로 무신 정권이 성립이 되었다. 허나 무신간의 권력을 계속해서 쟁탈전을 펼침으로 집권자가 자주 바뀌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의방 정중부를 시작으로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이렇게 계속 권력 집권자가 바뀌었고,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이후 4대 동안 총 60여간 최씨 무신 정권이 이어지게 되었다. 최충헌은 교정 도감을 설치하여 정치를 하였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봉사 10조를 제시하여 군사 정변을 합리화하려고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방을 부활시켜 도방을 확대 강화시켰고, 이 도방은 선벌초와 함께 최 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새우는 정방을 설치하였는데 정방은 독자적인 인사 행정기구로 자신의 집에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인들의 수기 기간 으로서 문관들을 참여시켜 자문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삼별초가 조직이 되었는데, 이는 무신 정권의 군대였다가 군사적,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으나 몽골 침입 당시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이었다. 농민들과 천민들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백성들 사이에서 누구나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짐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대표적인 봉기로는 망이망소이의 난과 만적의 난이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있다.

4. 대외관계

 

거란이 성장하여 요를 건국하였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고려는 친교를 맺고 고려는 거란의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관군을 창설하였다. 거란이 침입하였는데 제1차 친입 때는 거란의 장수 소손령이 침입을 하였고,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인하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2차 침입 때는 광주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 성종이 침입을 하였고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이 철수하였다. 3차 침입 때는 거란의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거부를 이유로 진입하였고, 강감찬의 기주대첩으로 승리하였다. 이 세 번의 침입으로 인하여 거란과 친선 관계가 수립되었다. 여진이 성장을 하였는데 성장을 하게 되면서 고려와 충돌이 일어났고, 여진 정벌을 위해서 기병을 보강한 별무반을 편성하였다. 윤간이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을 북방으로 축출하고 동북 지방 일대에 부성을 축조하였으나 여진의 계속된 침입으로 조공을 약속받고 돌려주었다여진이 강성하여 금을 건국하였고,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의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는데 당시 고려의 집권자인 이자겸이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몽골의 침입을 하였는데 1, 2, 3차 침입으로 인하여 황룡사 구축 목탁이 소실되었고, 팔만대장경의 조판이 시작이 되었다. 삼벌초는 무신정권의 핵심 부대였는데 마지막까지 몽골에 항쟁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하였는데 두 번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의 복주로 피란을 가게 되었다. 왜구가 침입하였는데 고려는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한 후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하였고, 박위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5. 원간섭기

 

원의 간섭이 시작되었는데 원의 간섭기에는 부마국 체제가 성립이 되어 고려 왕의 직위가 원의 통제와 승인 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관제와 왕실 호칭이 격화되어 2성 6부가 1부 4사 로 바뀌고 국왕 묘호의 충자를 사용하였다. 정동행성이 설치되어서 원이 군대와 물자를 강요하였고, 고려의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자원을 수탈당하였다. 이 원 간섭기로 인하여 고려의 변발, 호족, 호복, 족두리, 연지 등 몽골 풍습이 유행하였고,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조혼 풍습이 등장하였다. 성리학, 목화 등 새로운 문물이 전래되었다. 이 시기에는 권문 세족이 성장하였는데 원세력을 배경으로 고위 관직을 장악하였고, 불법적인 토지 침탈로 대농장을 경영하여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재정에 공급되고 농민 생활이 빈곤해졌다. 충렬왕 때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양인을 해방시키려 하였고, 동령부와 탐라 총간부를 회복하였다충선왕 등은 사림원을 설치하였고, 원에 망권당을 설치하여 원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펼쳤는데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쳐 수 있었던 대내외적인 상황은 14세기 중엽 원이 쇠퇴하였고, 신진 사대부가 성장을 하여 반원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관제를 복구하고 영토를 수복하였다. 왕권 강화 정책으로는 신진 사대부의 정계 진출을 할 수 있게 했고, 정방을 폐지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관문 세족의 기반을 약화시켰으나 원의 압력과 홍건적과 외부의 침입으로 정세가 불안하여 실패하였다. 신진 사대부가 과거를 통하여 중앙, 신진 사대부가 성장을 하였는데, 이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가 됨으로써 성장하였고,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 불교 폐단을 비판하였으며, 권문세족의 비리와 불법 행위를 비판하였다. 고려는 시흥 무인 세력의 성장으로 인하여 멸망하였는데,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갔다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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