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초기
신라는진한의 소국인 사로국에서 출발을 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 세력과 남한 이주민 세력이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하였고 점차 주변에 진한 세력을 복속시키면서 성장을 하였다. 초기 신라 신라는 6부족 연맹체로 6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왕권이 미약하여 박 씨, 석 씨, 김 씨, 총 세 성 씨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선출되었다. 신라의 국가로는 화백회의가 있는데 귀족 대표 회의고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으며, 상대 등은 화백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이고 국정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골품제가 있어서 폐쇄적인 신분 제도가 있었으나 있어 골품에 따라 관직 진출과 일상생활까지 제한을 받았다.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서 발전이 늦어졌다. 허나 내물왕 4세기 후반에 중앙집권 국가로서 성장을 하였는데 내물왕부터 김 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고, 왕의 칭호로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가야와 왜에 친입을 받았지만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물리쳤고, 눌지왕 때와 소지왕 때 나제 동맹을 맺었다.
2. 신라의 전성기
신라는 지증왕 때부터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라고 고치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순장을 금지하고 우경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였으며, 수도에 동시를 열고 관리 기관인 동시전을 설치하여 상업을 발달시켰다. 법흥왕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시켰으며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들을 정비하였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인의 정신적 통합을 도모하였고, 영토를 확장하여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김해 지역을 확보하고 건원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진흥왕 때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는데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여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으며,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 전체를 차지하였다.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양까지 진출하였고, 단양 신라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세움으로써 영토 확장을 알수있다. 대내 기반으로는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여 유능한 인재를 양성시켰고, 황룡사를 건립하고 불교 집회를 개최함으로써 국가의 통합과 발전을 기원하였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고 거칠부에게 역사서 국사 편찬을 지시하여 왕권 강화와 강해진 국력을 과시하였다. 7세기에는 진평왕 때는 버리고 선덕여왕 때는 첨성대를 건립하고 자장의 권위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3. 고구려, 백제의 멸망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 이후로 연합이 형성이 되었는데 남북 세력은 고구려, 백제, 왜, 돌궐과 동서 세력인 신라, 수, 당나라가 연합을 하였다. 수나라가 침입을 하였고 고구려가 항쟁을 하였는데 수 양제가 침입을 하여 요동성을 직접 공격하였으나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의 별동대를 유인하는 작전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둔 게 살수대첩이고 612년이다. 고구려 원정 실패로 국력이 소모하여 반란으로 멸망하여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당이 적극적으로 평창 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를 압박하였고, 이 압박에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축소하여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세웠으며, 권력 장악 후 신라 당의 강경책을 유지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고구려의 몇몇 성들을 함락하였으며, 안시성 싸움에서 당나라가 패배하였다.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당나라와 연합군을 편성하였고, 그 이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계백의 백제군과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승리를 거두어 백제가 멸망하였다. 수나라, 당나라와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인하여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평양성에 함락당했고,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부흥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배하였고, 신라 문무왕이 당을 견제하기 위해 안승에게 지금의 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게 하고 보덕궁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당나라가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펼치자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신라가 이겨서 삼국이 통일되었다.
4. 삼국의 경제와 학문
삼국의 경제는 수취 제도가 있었는데 조세, 공물, 역 즉 곡물과 포를 징수하고 특산물을 징수하고 15세 이상 남자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수취 제도가 있었고, 토지 제도가 있었는데 시급은 왕족이나 공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하고, 녹읍은 귀족에게 일을 한 대가의 개념으로 지급하였다. 백성 생활 안정 노력을 위하여 고구려 고국천왕 때 진대법을 실시하였고, 신라 지증왕 때 동시와 시장 감독 기관인 동시전이 설치되었다. 삼국의 학문으로 고구려는 태학, 경당이 있었고, 백제는 유교 경전, 기술을 교육하였고, 신라는 임신서기석이 있어서 유교 경전을 공부했음을 짐작하였다. 역사서로는 고구려는 이문진의 신집 5건 이 있었고, 백제는 고흥의 서기를 근초고왕 때 썼고, 신라는 거칠부의 국사를 진흥왕 때 썼다.
5. 삼국의 종교와 문화
불교 고구려는 소수림왕때 수용하였고, 백제는 침류왕때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수용하였고,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하였다. 신라는 특히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의한 자장에 의하여 목탑이 건립이 되었다. 삼국은 고분 문화가 있었는데 돌무지무덤, 굴식 돌방 무덤, 벽돌 무덤, 돌무지덧널무덤 이 네 가지 종류가 있었고, 고구려는 돌무지무덤과 굴식돌방 무덤이 있었는데 특징으로는 벽화가 있었는데, 강서대묘의 사신도, 무용총의 무용도, 각저총의 씨름도를 통하여 벽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는 돌무지무덤과 굴식돌방무덤, 벽돌 무덤이 있었는데, 공주 무령왕릉의 경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이 양식으로 있었다. 삼국은 금속 기술도 발달을 하였는데 특히 백제에는 칠지도와 백제금동 대학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