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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준비

삼국시대 1

by leahya 2025. 2. 15.

1. 고구려 초기

 

고구려는 주몽 즉위 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중국의 군현에 맞서 싸우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이동하여서 수도는 국내성이었고, 태조왕 때 옥저를 정복하였고, 고국천왕 때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미천왕 때 서안평을 공격하였고, 대방 낙랑을 축출하여서 대동강 이남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전용과 대립하였다. 고국원왕 때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인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함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기가 있었으나 소수림왕때 불교가 수용되고 공인이 되었고 태학이 설치되고 율량이 반포됨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왕족인 계류부 고씨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이 모여 제가 회의를 통하여 국가를 운영하였으며, 대대로를 선출하여 대대로가 국정을 총괄하였다. 행정 구역으로는 수도 5부, 지방 5부 가 있었다.

 

2. 고구려의 전성기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 대왕 때인데,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으로 인하여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였다. 다음 장수왕은 국내성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아산만에서 경북 동해안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웠다.

3. 백제초기와 전성기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인 온조가 한강 유역의 토착민 세력과 함께 건국하였고,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농경과 철기 문화가 발달되었고, 바닷길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에 유리하였다. 백제는 왕족인 부여시와 8성의 귀족이 정치를 주도하여 정사암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였고, 행정 구역으로는 지방의 22담로의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고이왕 3세기 때 6좌평제, 16관등을 마련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대부분의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근초고왕때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마한에 남은 세력을 정복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해외로는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고 일본의 규수 지방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역사서는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다. 침류왕 때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을 통일시키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의 사상적 뒷받침이 되게 하였다.

4. 백제 후기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공격을 받아 한강 이북을 상실하였으며, 5세기 전반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으나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되었다.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수도는 웅진으로 문주왕 때 천도하게 되었다. 문주왕 다음인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나의 동맹을 강화하였고, 무령왕 때는 중국 남조와 국교를 강화하여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무덤 양식이다. 지방 22담로의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 또한 강화하였다. 성왕에 중흥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는 수도를 부여로 천도하였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으며,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하였다. 이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하였는데,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기습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함으로 나제 동맹이 완전히 결렬되었다. 7세기 무왕은 서동요 실화의 주인공으로 익산의 미륵사를 건립하였고,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

 

5. 가야

 

가야는 2세기 이후 낙동강 하류 지역의 변원 땅에서 연맹 왕국으로 형성되었는데, 전기 가야연맹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을 이뤘고, 교역 활동으로는 낙랑과 외의 철을 수출하였다. 철이 너무 많아서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처럼 사용을 하였다. 5세기 초 고구려 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 남조, 왜와 교류를 많이 했고, 백제와 함께 고구려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왔다. 그러나 6세기 백제와 신라가 가야로 진출하면서 압박하여 후기 가야연맹이 쇠퇴하였다. 신라 법흥왕 때 금강가야가 멸망하였고 신라 진흥왕 때 대가야가 멸망하여 가야연맹이 해체되었고 가야는 연맹 왕국 단계에서 멸망하였다. 가야 문화로는 우륵이 가야금과 가야 음악을 신라에 전달하여 신라의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가야 문화유산으로는 철채 갑옷과 가야 토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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